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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게시물

Rev. David Kil Kim
2023년 6월 16일
In 목회실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을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기록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이시라고 계시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에 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계시하셨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거룩하신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 죄와 상관없으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의 양심은 죄로 물들었을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 6:5).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화목했었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그의 양심은 죄로 물들게 되고 또한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깨어진 상태 즉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롬 3:23; 엡 2:1).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못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죄에 대해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신 것입니다.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이사야 45:21)        그런데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심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끝까지 죄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들과는 달리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이유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17)        거룩하신 하나님은 차마 인간의 죄를 목도하지 못하시기에 최초의 인간에게 말씀하신 바를 지키기 위해서(창 2:17) 인간의 죄를 물으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에게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자 독생자를 인간을 위해서 희생시키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나님과 태초의 관계로 회복하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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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23년 6월 16일
In 목회실에서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삼위일체’란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각각의 인격체이신 성부, 성자(예수님), 성령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라는 교리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개념은 성경의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세기 1:26)        여기서 “만들고”라는 히브리어 ‘나아세’는 성경 원본에서 ‘1인칭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 창조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리’ 라는 표현은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밀접한 협의와 상호 협조가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인류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대표적인 행위인 바벨탑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등장합니다(창 11:7). 또한 천지 창조 과정에 있어서 성령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활동하셨음이 창세기 1장 2절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 역시 성자 예수님도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요 1:2, 3).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셋이 아니라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명기 6:4).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3장 30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서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야고보 역시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알고 있고 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야고보서 2:19)        사람으로 치자면 분명히 3명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왜 하나님은 한 분일까요?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하고 있으나 오직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님으로 나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처럼 세 위격이신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시다.’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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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23년 6월 16일
In 목회실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고픈 사람들은 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고집합니다. 우스꽝스러운 예화들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누가 더 잘 만드는지 경쟁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인간이 창조적인 생각으로 여러 가지 흙, 돌과 나무로 멋진 무언가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자랑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 재료로 만들지 말고 너의 재료로 만들어야지!”        인간이 재료로 쓰는 것들은 다 이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기껏해야 기존에 있던 것들을 변형하여 새로운 것이라고 우길 뿐이지만 그것 역시 과거에 크기와 모양은 다를 뿐 이미 다 있었던 것들입니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도서 1:10).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세상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에베소서 4:6).        만유(all)란 온 우주를 의미합니다.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신다는 말은 온 우주 밖에서 우주 곳곳을 면밀히 지켜보시며 유지하신다(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는 뜻입니다. 그리고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말은 온 우주 곳곳에 충만하게 계신다(in all)는 의미입니다. 즉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우주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인간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면밀히 지켜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있는 그 어떤 장소에도 계십니다. 이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편 139:7, 8,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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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23년 6월 16일
In 목회실에서
 믿음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믿음의 대상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턱대고 아무것이나 믿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은 물론 행동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성도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 분야에서 박사가 될 수는 있어도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박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새로운 정보나 발견으로 다시 뒤집어지고 있습니까? 그렇기에 지식도 믿을 바가 못 됩니다. 그렇다면 경험은 어떨까요? 인간의 지식도 한계가 있기에 자신이 경험한 것을 지식화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돈은 어떨까요? 돈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에 과연 평안이 있을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이사야 46:9).        다른 신은 인간이 만든 우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도 기운도 없는 인간이 조각한 것일 뿐입니다. 세상의 참신은 오직 하나님 한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참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는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매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혹자는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거절하지만, 성경은 세상 모든 나라의 모델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일하셨는지를 기록한 책이기에 우리는 열린 마음과 믿음의 눈으로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현재 상황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인류는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지 그분의 말씀대로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로봇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아 자발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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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태동한 교회는 2,000년 가까이 그리스도인을 만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가는 곳마다 또 다른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에 한국은 1990년대에 그야말로 역사상 경험할 수 없는 기독교의 황금기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도덕적인 타락과 교회의 세속화로 기독교의 성장은 정체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유럽은 50년 전에, 미국은 30년 전, 그리고 한국 교회는 이미 10년 전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기독교가 사상과 윤리, 생활양식을 통해 서구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계몽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포스트모던이즘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을 향도할 만한 도덕성의 결핍으로 진리를 실천으로 옹호하지 못하였기에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교회 내의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원의 방편 즉 일종의 천국 보험으로만 여길 뿐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이 땅에서의 책임과 의무에 무관심해 왔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내기 보다는 자신들을 옹호하는 제자로 키워왔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와 관계가 틀어질 때면 어김없이 이 교회 저교회를 배회하다가 소위 가나안 성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이 땅의 유일한 구원의 방주임을 알지 못한 체 “교회는 안 다녀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한 교회에 등록하여 체계적으로 신앙 훈련을 받아 예수님의 신부로써 준비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건 목사님의 생각일 뿐 저는 그렇게 안 배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지도 않고 또한 잘 몰랐기에 잘못된 가르침에 오도(誤導)되어 버린 것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7:11). 귀로 들은 것을 성경 말씀과 비교해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준 이유는 들은 바를 성경에서 찾아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된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만연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듣는 모든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찾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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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속한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두 가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섬김과 증인의 책임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성도가 세상을 섬긴다는 말은 세상의 문화에 동화되어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성도의 섬김은 바로 사랑입니다. 가장 적절한 예가 바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 준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눅 10:25-37). 성도는 바로 이 사랑을 실천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신의 비용[다른 말로 희생]을 지불하면서까지라도 세상에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를 섬길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삼상 22:2). 다음으로 믿음의 공동체에 속한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은 기쁨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증인의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만약 당신이 자발적으로 증인으로의 헌신된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면 이것이 주님의 명령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마 28:18-2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복음의 증언자의 삶을 살지 않을 것까지 알고 계셨기에 승천하시기 전에 지상명령(至上命令)으로써 복음 증거의 삶을 살라고 모든 성도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성도는 섬김의 책임과 증인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구원받은 자로써 불신자들을 상대로 이러한 책임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의 구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사랑의 감격과 구원의 기쁨을 상실한 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 것은 단지 종교 의식[혹은 종교 생활]일뿐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종교 생활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 소속된 성도는 세상을 향한 섬김과 증인의 책임을 통해 참 경건의 능력인 변화된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당신은 종교 의식 외에 변화의 삶을 살고자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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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기독교에서 성도를 향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예수님과의 관계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는 바로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제자’라는 단어에는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신 열둘은 사도이기 전에 ‘제자’였고,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이들은 ‘제자’로서 선생인 주님의 가르침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 동안 기독교는 성도를 향해 ‘제자’라는 단어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고집하여 왔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쉬워합니다.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제자’라는 단어가 이후 수세기 동안에도 계속 사용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 인식하고 ‘제자 훈련’을 받아야 할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더라면 하는 것이다. (존 스토트의 <제자도>에서) 기독교가 그동안 ‘제자’라는 단어 대신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수님과 마땅히 가져야 할 선생과 학생간의 긴밀한 관계를 놓친 것은 물론 제자로써 삶을 등한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속적인 세속화와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대한 좋은 증거들일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특권을 누리기만을 원할 뿐 그 특권에 수반되는 책임은 등한히 하는 풍조가 현대교회 안에 만연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 즉 ‘돈이며 다 할 수 있다’는 사고가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들은 비단 교회에서 훈련이나 기도회 등 모임을 개최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찮게 여길 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됐지 무슨 훈련이냐?”라는 식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구원이 그렇게 쉬운 것일까요? 그런 태도와 자세가 과연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1-23). 제자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믿는 것이 바로 자신만의 착각인지는 왜 모를까요? 제자로 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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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믿는 모든 이에게 제자도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도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제자도란 교회 직분자라고해서 반드시 지불해야하는 것이고 직분이나 교회에서 맡은 것이 없다 해서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모든 성도에게 똑같은 대가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단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사마리아인은 물론, 심지어 이방인들로써 교회에서 장로, 또는 집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서부터 평범한 교인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한명도 예외 없이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도란 승천하시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마 28:18-20). 그러므로 제자의 길 즉 제자도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요 또 걸어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써 삽시다!”라고 하면 교회에서 몇 주 동안 실시하는 특정한 프로그램을 상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특정한 프로그램과는 상관없이 제자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실시하는 이유는 영적으로 더 성장하고자 원하지만 뚜렷한 방법을 모르는 이들과 영적으로 더 성숙할 필요가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제자도를 실천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임한 사도들에게 교회를 세워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시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선물로 교회에 성경과 목사를 주시어 모든 성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한 사명자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춘 사역자를 만들게 하셨습니다(딤후 3:17). 그렇기에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예배와 선교, 구제와 봉사와 더불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을 교회의 핵심 가치로 알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도록 영적인 배움에 힘쓰고 영적인 수련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본인의 힘만으로 되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서 제공하는 특정한 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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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대개 대답을 꺼려합니다. ‘교인이면 됐지 무슨 예수님의 제자까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필요를 못 느끼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교인을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를 제자들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도가 교인이 되는 것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더욱 원하십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다 순교한 후에도 교회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에서는 ‘제자’라는 말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지역에서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 부른 호칭이었습니다(행 11:26). 이제 다시 ‘제자’라는 말을 교회에서는 사용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확인하고 제자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로써 삶을 살게 될 때, 불신자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모든 성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제자도(Discipleship)’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라는 말의 정의도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어떠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인격과 삶의 이야기들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도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제자도란 믿는 자의 삶이요, 걸어가야 할 과정이요, 끝까지 지향해야할 할 목표이자 동시에 교회의 사역 자체입니다. 사실 제자도란, 정의를 내릴 문제라기보다 실제적인 인격과 삶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인격과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써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만이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로 사신 교회의 진정한 회원일 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 유일하게 믿음이 있는 자로 인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모든 성도들을 깨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평신도를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성경을 펴고 제자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르치고 배워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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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큰 선물이 3가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령님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아마도 성령님의 은사와 성령님을 혼동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3위1체 하나님의 3위격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큰 선물은 바로 성경과 목사와 제자 훈련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써 인간의 모든 삶의 완전하고 객관적인 신앙의 기준입니다. 그럼으로 저자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목사에 대한 말씀은 에베소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 12). 위 절에서 말하는 목사와 교사는 각각의 직분이 아닌 한 직분입니다. 즉 목사는 말씀 선포와 가르치는 일을 둘 다 겸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파송한 목사는 말씀 선포와 가르치는 일을 함으로 성도들을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인격의 성숙함으로 자라게 하여 봉사의 일들을 감당하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참고로, 위 말씀에 언급된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바울을 칭하며 선지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자칭 사도와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교회는 분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자 훈련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함은 이미 주님께서 제자 훈련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항상 동거하시면서 그들이 주님께 배우도록 하셨습니다(막 3:14). 주님은 구약의 말씀과 주님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삶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또 다른 제자들을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19; 참고. 딤후 2:2). 그렇기에 제자 훈련은 성경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실생활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도록 하는 훈련으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 가지 선물들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즉 목회자는 성경 공부와 주님이 보여주신 제자 훈련의 모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주님께서 위탁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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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예수님의 제자는 교회 안에서 제자 훈련 과정을 밟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미 훈련을 다 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남달리 헌신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붙이는 이름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접어든 자들을 지칭하는 이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소명에 의해 성직자나 선교사가 된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별칭도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 대답에 대해 마이클 윌킨스의 견해를 빌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제자도」라는 명저를 통해 우리가 ‘제자’, ‘제자도’에 관해 오해하기 쉬운 점들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제자도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다. 자신이 성숙한 신자냐 아니냐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헌신한 자는 지불해야 하고 아직 헌신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모든 신자에게 똑같은 대가를 요구하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일단 예수를 믿고 무리 가운데서 앞으로 나온 사람이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사도행전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대인, 사마리아인을 망라하여, 심지어 이방인들까지, 그리고 교회에서 리더십을 행사하는 지도자든 그렇지 아니한 평범한 교인의 한사람이든 간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모든 사람이 다 제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대사명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요 또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무슨 프로그램이나 헌신도나 성숙도에 의해 취사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써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믿는 자가 다 제자임에 틀림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제자의 삶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사명을 보면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가서 전도를 해야 하고, 세례를 주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말씀으로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갓 믿고 돌아온 회심자도 제자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정식으로 하고 있는 자도 제자요 열심히 배우면서 성숙하기를 힘쓰는 자도 제자인 것입니다. 즉 성도는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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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항상 그분과 함께 거하면서 배우게 하셨습니다(막 3:14). 즉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 열두 제자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었습니다(요 17:6).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진리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부 다 전수하셨을 뿐만 아니라(요 17:14)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들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요 17:19).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숨기셨지만 열두 제자에게는 드러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주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고백에 만족하시면서 그 고백 위에 그분의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 16:16-20).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가까워 오자 그분의 남은 모든 정성을 열두 제자를 위해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실족할 것까지 아시고 후속조치까지 치밀하게 준비하신 후 십자가형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을 깨닫지 못하고 실족하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은 이생의 삶이 천국을 위한 무대임을 즉 주님의 꿈을 실현하는 기회임을 깨닫고 가는 곳 마다 불신자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며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고자 예수님께서 지시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제자로써 사는 것이 부담이 되십니까? 위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된 자들과 끝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임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님의 제자로써 산다는 것은 짐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의 제자만이 주님과의 친밀한 동행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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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제자훈련에 참여하세요!’라고 하면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제자훈련을 받아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제자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직접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전통적인 유대 선생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직접 찾아다니시면서 그분이 원하는 얼마의 사람들을 제자로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필요로 하셨을까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4, 15). 마가의 기록대로 예수님은 자신의 이 땅의 사역을 이어서 계속할 사람들을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장신의 춘계(春溪) 이종성 박사는 “예수께서 필요한 것은 그의 말이 그대로 인쇄된 산 교본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제자들이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열두 명은 여러 명의 다른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하룻밤을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6:12). 이에 대해서 고신의 장희근 박사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떼어 놓을 수 없도록 예수님에게 묶임을 당하고 그의 참모가 되고 돌격대가 되고 오른팔이 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과 같이 다니며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세상으로 보냄을 받기 전에 예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예수님과 같이 되지 아니하며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훈련을 통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진정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예수님의 ‘사도(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들1)’이 되었습니다(눅 6:13)1). -------------------- 1) 헬라어 명사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전령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다. ‘전령’을 뜻하는 헬라어는 ‘앙겔로스(ἄγγελος)’이다. 이 말에서 ‘천사’를 뜻하는 ‘angel’이 파생되었다. ‘아포스톨로스’는 특사나 사자의 의미를 넘어 ‘대사, 대표자, 공식 대표’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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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천국에서 세 가지 놀라운 일을 보게 되겠지... 첫째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 둘째로 기대했던 사람이 그곳에 없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내 자신이 그 곳에 있다는 사실.” 이는 죽기 전에 존 뉴턴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에 영국에서 태어나 7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10살에 학교 공부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뱃사람이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에 가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미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노예를 배에 싣고 오다가 산 사람을 상어의 먹이로 내어주는 악마적인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악하게 살던 뉴톤에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이 있었습니다. 1748년 3월 10일 대서양을 항해하던 존 뉴턴에게 큰 폭풍우가 휘몰아쳤습니다. 배가 파선의 위험에 처하자 뉴톤은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성경책을 꺼내들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내 어머니의 하나님이시여, 저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시고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남은 생을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 순간 그 무섭던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뉴턴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위대한 복음전도자, 신학자, 찬송가 작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늘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은 것 찬송들 중에 지금도 깊은 감동을 주는 곡이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입니다. 존 뉴턴은 1758년 영국 성공회 사제로 안수 받아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1779년부터 1807년까지 St. Mary Woolnoth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무력하고 상처입은 수천 명의 피가 영국을 향해 울고 있다"고 외치며 정치가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를 설득하여 영국 의회에서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서 싸워줄 것을 계속해서 요청했습니다. 그가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교회는 교회 마당에 있는 그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놓았습니다. "한 때는 이교도였으며, 탕아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은혜로 되살아났고 소생케 되었으며 그가 없애려고 애쓰던 그 복음을 위해서 전파자의 사명을 받아 근 16년간을 버킹검에서 28년간을 St. Mary Woolnoth 교회에서 사역했다." “John Newton Clerk once an infidel and libertine a servant of slaves in Africa was by the rich mercy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preserved, restored. Pardoned and appointed to preach the faith. He had long laboured to destroy hear 16 years as Curate of the parish and 28 years as rector of St. Mary Wooln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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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로이드 베이커 교수는 그의 물리학 박사학위 논문에서 특별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그것은 학생과 교수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쓴 논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학기 초마다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겠으면 여러분의 전공을 바꾸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공부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을 싫어합니다. 힘껏 노력하십시오.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 약 50%는 내 과목에서 학점을 받지 못하고 실격할 것입니다. 이 50% 가운데 끼이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 예측이 언제나 적중하였다는 것이다. 학생들 중 50%는 예측대로 성적 미달로 실격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교회의 목사님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또한 감명 깊은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나의 태도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보다 적극적인 생각과 의욕을 가져야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설득력 있게 가르치고 감격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난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제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부딪친다 해도 당신은 기도와 성경을 통하여 그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함께 안주하고 계심을 또한 깨달았다. 그때부터 학생들에게 전과 달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 과목을 이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이 과목을 잘 이해하며 학점을 받도록 하는 것이 나의 의무요 나의 꿈입니다. 공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모두가 서로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 중에서는 단 한 명도 낙제하지 않고 이 과목을 무사히 이수할 뿐 아니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후부터 교실 내에 분위기는 예전과 전혀 달라졌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기 전에는 내 학과목의 낙제생은 50%이었지만 내가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수업시간을 하고부터는 한 명의 낙제생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한 학생은 C+를, 한 학생은 B+를 받았을 뿐 그 이외의 모든 학생들은 A나 B를 받았다. 나의 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학생들의 성적과 태도를 변화시켰다고 믿는다. 세상 사람들도 적극적이면 잘 될 것이라고 믿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주로 믿는데 이들보다 못해서야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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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10월 18일
In 목회실에서
‘절제’란 무엇일까요? 살찔까봐 걱정하여 맛있는 것을 보면 참는 것이 ‘절제’일까요? 대체로 ‘절제’를 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절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50%만 맞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더불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도 절제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피곤해서 잠을 이기지 못하고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할 때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님들한테 해가 져서 문을 닫을 때까지 일관되게 친절을 베풀어야지!’ 하면서도 오후가 되면 지쳐서 건성건성 해버리는 경우는 해야 할 마땅한 일에 절제력을 잃어버려서 발생되는 경우입니다. 성경에는 절제하지 못해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에서는 식욕을 절제하지 못해 팥죽 한 그릇과 자신의 장자권을 바꿈으로 인해 믿음의 족보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삼손은 한 여인에 대한 정욕을 절제하지 못해서 자기 힘의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절제하지 못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 화를 내는 바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선지자가 해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렸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전리품들 중 좋은 것을 남겨두었기에 그와 그 후손이 누릴 수 있었던 영원한 왕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욕을 주체하지 못해서 간음과 살인죄를 저질러 그의 집안에 칼부림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왜 절제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에 놓여 있는지 그 이유를 알 듯 합니다. 절제 없는 사랑은 싸구려, 헤픈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희락은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더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화평은 게으름과 나태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오래참음은 홧병을 만들고 한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자비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양선은 완벽주의, 결벽주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충성은 쉼과 기쁨이 없는 노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 없는 온유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줏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절제’란 그리스도의 영광(榮光)과 교회의 건덕(健德)을 위해서 지혜롭게 과감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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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7월 29일
In 목회실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바울의 이 말은 자칫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기복신앙)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 많이 심은 성도가 받는 복은 하늘의 복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요 1:12). 그리고 주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복입니다(마 28:20; 요 14:16). 물론 이 땅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마 6:25-34). 사실 이 땅에서의 재물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달란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달란트가 다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 땅에서 재물을 잘 모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재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신명기 8:17, 18).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재물을 모으는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있는 물질에 대한 재능을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많이 심은 자들에게 영적인 복을 많이 거두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성도는 자녀가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거나 아니면 하늘나라에 예비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한 헌금에 대한 자세를 다음 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마음에 정한 대로’라 함의 원뜻은 ‘마음에 미리 준비한 대로’ 또는 ‘그 마음에서 이미 그 스스로 목적한 대로’(just as he has purposed in his heart, NASB)입니다. 즉 남이 얼마를 내든지, 또는 남이 얼마만큼 내는지에 상관하지 않고 헌금하는 성도는 스스로가 ‘마음에 생각해 오던 대로’ 헌금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란 하나님의 관심이 헌금의 많고 적음이 아닌 헌금을 내는 성도의 마음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헌금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가치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보는 사람의 눈이나 어떠한 외적인 강요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동안 당신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얼마나 헌금할 지를 마음으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액수가 적어도 괜찮습니다. 그러한 자세로 헌금을 드릴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을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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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7월 29일
In 목회실에서
로마 가톨릭이나 성공회는 주로 예전(禮典)과 형식이 중심이 된 예배를 드립니다. 반면 개신교는 교파마다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령의 임재(성령의 직접 경험)를 강조합니다. 종교개혁 후 개혁교회는 ‘참회의 기도’를 통해 죄를 고백하게 한 후, 이어서 ‘용서의 확신’ 순서로 예배를 시작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보내면서 실수한 것들을 먼저 하나님께 통회한 후 예배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의 올바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통성기도와 함께 예배를 시작하는 이유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함입니다. 성경의 많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자신은 물론 민족의 죄들을 통회하고 응답 받았습니다.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 것은 좋은 신앙의 전통입니다. 이것은 외국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한국 교회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첫 순서로 “다 같이 묵도(묵상기도) 함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해 왔습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 예배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뿌리 깊은 관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묵상기도(묵도)’라는 순서는 기독교 예배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나 종교개혁자들의 예배 순서 그리고 최근 신구교의 어느 예배 순서를 찾아보아도 ‘묵도’라는 순서는 전혀 흔적이 없습니다. 선교사가 처음 조선에 들어 와서 예배를 드렸을 때, 한국 교회 초기 성도들 중에 예배가 시작할 때 떠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1920년대의 교회의 모습을 기록한 글입니다: “남에게 방해가 되는지 유념도 주의도 없이 큰 목소리로 자기네들 일주일 간 지내오던 잡설이던지, 혹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리운 친구라도 보면 그를 따라가 앉아서 정담을 하거나...” 이러한 환경에서 예배의 엄숙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정서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제의(제사)문화를 ‘묵상기도’라는 형식으로 활용했었던 것입니다. 개혁 교회의 예배는 성령님의 임재를 강조 합니다. 예배자는 참회와 확신을 통해서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물론 조용히 참회할 수도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처럼 부르짖으며 예배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물론 옆 사람에게 방해를 줄 정도의 지나치도록 큰 소리는 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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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7월 15일
In 목회실에서
사도신경은 기독 신앙의 요약문입니다.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사도(使徒)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은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전하여준 고백을 기초로 박해가 끝난 후에 교회들이 모여서 정리한 것입니다. 박해가운데에서도 초대 교회 안에는 이단과 거짓 가르침이 난무했습니다.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혹은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인성을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는 이들이고 신성을 부인하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을 이단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을 담은 신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십자가 모양의 구름을 보고 전쟁에 승리하였다고 합니다.1) 그 후 그는 공식적으로 첫 번째 “크리스천” 로마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성도들을 이단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가 기독 신앙의 핵심 신조를 필요로 하자, 첫 번째 크리스천 황제로 자부하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325AD경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후 사도신경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 회의’, ‘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쳐 수정되면서 지금의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이 처음 니케아 종교회의와 유사하기에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도신경은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사도신경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끝 부분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현대 교회가 모든 공모임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단과 구별되게 믿음을 고백하며 이 땅에 이미 출범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재림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유지하고자 함입니다. 1) 로마 시민 가운데 정결한 처녀가 없었기에 순결한 크리스천 여인인 헬레나Helena를 통해 낳은 아들이 바로 콘스탄틴Constantine이었다. 콘스탄틴이 AD312년 10월 28일 그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로마의 막센티Maxentius와 밀비안Milvian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해를 쳐다보았을 때, 콘스탄틴은 십자가의 빛과 함께 ‘십자가와 함께 싸워 정복하라!’는 글자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십자가를 그려 넣게 하여 하여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 승리한 콘스탄틴은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의 지위를 굳히고, AD313년에 공동황제 리키니Licinius와 함께 밀라노Milan 칙령을 발표하여 로마제국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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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2019년 7월 08일
In 목회실에서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Celebrate the Feast of Harvest with the firstfruits of the crops you sow in your field. "Celebrate the Feast of Ingathering at the end of the year, when you gather in your crops from the field.”(NIV) “맥추절”이라는 히브리어 “하그 하카치르”는 문자적으로 보리의 첫 열매를 얻는 “수확의 절기”, “수확절”입니다. 다른 말로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NIV에서는 “the feast/festival of harvest”(수확의 절기)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서 맥추의 초실 즉 맥추절에 밀/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현대력으로 하면 5월 중순에 해당합니다. 보통 이스라엘 땅에서 보리수확의 첫 열매는 유월절(현대력으로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이후 첫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동이 트면 사람들은 유월절(니산월 14일)에 묶어 두었던 보릿단을 자르러 보리밭으로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보릿단을 낫으로 베고, 첫 열매로 거둔 이 보릿단을 성전 뜰로 가지고 갔습니다. 제사장은 이 보릿단을 가지고 번제단 북동쪽에 서서 지성소가 있는 서쪽을 향해 흔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레 23:10-11). 이후 보릿단은 갈아서 곱게 체질을 해서 소제(meal offering)로 바쳤습니다(레 2:14-15). 한 줌의 보릿가루를 번제단의 불에 던져 태우고 한 마리의 숫양을 번제로 바쳤습니다(레 23:12-13). 남은 보릿가루는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이렇게 첫 열매 제사가 성전에서 드려진 후에 예루살렘 시장에서는 곡식 판매가 시작되었고 추수한 곡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맥추절”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맥추절은 3월 하순이나 4월 중순에 지킵니다. 그러나 한국은 보리 추수를 주로 6월 중순이나 말경에 하기에  하나님께 수확의 감사로 한국 교회는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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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David Ki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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